B컷 사진의 매력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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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웰메이드’로부터의 일탈. 사진을 취미로 하면서 필연적으로 마주칠 수 밖에 없는 수많은 B컷들. 잘 나온 A컷 뒤로 감추고 싶은 실수 투성이인 B컷들의 의미와 매력에 대해.

크레딧: songdiamond

‘전 부대원은 즉시 A급 군복을 환복하고 연병장으로 집합…’ 요즘도 가끔 꾸는 군대 악몽에서 스피커를 찟고 귀를 쩌렁쩌렁 울리는 저 목소리를 듣는다. 아, 망할.. A급 군복이 뭐야.. 하나는 땀과 흙에 쩐 군복이고, 하나는 안 입고 처박아둔 군복일 뿐인데…

조금 쌩뚱 맞은가? 내가 이번에 아날로그 라이프 스타일 면을 빌어 말하고 싶어 하는 것은 바로, 사진에서의 A와 B, A컷과 B컷에 대한 이야기이다.

1. B컷이란 무엇인가
B컷. 우리는 흔히 조금 덜 잘나온 사진, 지면에 실리지 못하고 용도 폐기되는 사진을 일컬어 B컷이라고 한다. 이런 B컷의 대척점에는 당연히 A컷이 있겠다. 광량, 셔터스피드와 조리개, 구도. 게다가 운 좋게도 모델의 환한 얼굴까지 담긴 그야말로 눈부신 사진이라면 A가 아니라 AA를 줘도 부족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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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녹록지 않으니.. ‘즐거운 생일파티’ 장면을 담으려고 찍은 뒤 기대를 잔뜩 품고 받은 필름 스캔본에서는 이런 초현실주의 정신에 입각한 사진과 마주하게 되는 일이 비일 비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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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은 멋진 배경을 담으려던 나의 의도는 간밤에 기분에 취해서 멋지게 쏴버린 술값마냥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 버리고, ‘술 마시면 가끔 바닥이 내게 올라오는 현상’을 포착한 다큐멘터리 사진으로 돌변해버리니… 오, 지쟈쓰.

2. B컷의 의미를 찾아서
그러면 과연 B컷은 쓸모 없기만 한 사진인가. 미니홈피나 페이스북에 올릴 사진을 고르면서 잠시의 고민도 없이 ‘다음 사진’ 버튼을 누르게 하는 그저 그런 사진일 뿐일까. B+로 나온 성적표를 부여잡고 집안사정, 장학금 이야기, 결석 없음, 존경하는 교수님 등등을 입에 오르내리면서 어떻게든 A학점으로 올려보려 사정에 통사정까지 해 본적이 있는 취업에 목맨 요즘 대학생활을 해 본 사람은 당연히 ‘B보다는 A, A보다는 A뿔!’을 외치겠지만, 적어도 사진 생활에 있어서는 B컷도 남다른 의미를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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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사진에서 무엇이 보이는가? 샴쌍둥이 처럼 나와버린 보컬? 격정적인 몸놀림을 주체하지 못하고 셔터의 노출시간을 훌쩍 벗어나 한 분의 심령을 등장하신 기타리스트? 분명 잘 찍은 사진은 절대로 아니다. 하지만 나는 이 사진을 보면서 이 날의 기억을 떠올린다. 땀으로 셔츠를 흠뻑 적시면서 노래하던 보컬. 한 타임의 공연을 보기 위해 살을 에는 추위에 떨며 기다리다 입장한 관객들의 열광적인 환호성. 모처럼 홍대앞이 홍대앞 같았던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 故 이진원씨의 추모공연 현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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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모그래피 스프로킷 로켓 파노라마 카메라 와 함께한 첫날의 기억도 이렇게 뿌옇다. 조작을 잘 못해서 덜컥 카메라 필름실 뚜껑을 열어 버렸는데, 나의 미숙함이 그대로 사진에 남아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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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은 지하철 계단 아래에서, 한 번은 계단 위에서 출근길의 모습을 담아보려고 했던 사진인데, 노출이 말도 안되게 어긋나 버렸지만, 메마른 출근시간대의 모습이 담긴 겉 같아 나름 의미 있는 사진이 되었다.

B컷들에는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어떤 형태로든 그 사진이 스스로의 ‘기억’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다. 음악에는 추억이 묻어 있다. 특정한 시간에 특정한 장소에서 누군가 특별한 사람과 함께 하던 때에 듣던 음악은 나를 그때의 기억 한복판으로 인도한다. 보이는 것을 그대로 찍는 것이 사진이라지만, 사진은 어디까지나 정지화면. 그 전후의 모습과 그날의 대화, 그때의 기분까지 보여주진 못한다. 하지만 나는 음악을 들을 때와 마찬가지로, 내가 찍은 사진을 볼 때면 그 전반의 기억을 추억하게 된다. 그 기억에 대한 애착은 그 기억을 떠올리게 만든 사진에 대한 애착으로 돌아온다.

3. 폐허의 컬렉션, 나의 사랑스런 B컷들의 컬렉션
나의 페이스북과 미니홈피도 수많은 A컷으로 가득하다. 왜? 못나온 사진을 굳이 대표사진으로 보여줄 이유는 없으니까! 그러나 쌓여가는 필름 무더기와 컴퓨터 안 스캔 받은 파일을 모아놓은 폴더에서 더 정이 가는 것들은 수많은 B컷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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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초점도 맞지 않고, 심지어 흔들린 이 사진에 마음이 간다. 홍대앞 어느 벽의 그래피티인데, 초점도 맞지 않고 심지어 흔들린 이 사진이 정말 우는 것 같다. 생일 축하 한다는 메시지가 적혀 있지만, 그 조차도 줄 것이 재주 밖에 없는 어느 작가의 작품으로 보인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크레딧: songdiamond

노출이 심각하게 안 맞은 이 사진도 ‘아둥바둥 살아가는 분들을 표현하려고 의도했다’라고 우겨버리면 땡이겠지만, 사실 뼛속까지 B컷이다. 하지만 내게는 의미가 있는 사진이다. 필름 카운터가 0에 맞춰지기 전까지는 노출계가 작동하지 않는 고집스런 카메라를 처음 사서 찍은 첫 롤의 첫 컷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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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춘선 열차의 운행 마지막 주에 혼자 떠난 여행에서 처음 본 밀전병. 신기해하다 차 시간에 쫓겨 부랴부랴 찍느라 정작 전병보다는 부침개 뒤집개가 더욱 선명하게 나와버렸지만, 보고 있으면 이게 뭐냐고 묻는 타지인에게 그냥 맛보라고 내밀던 아주머니의 따스함이 전해온다.

크레딧: songdiamond

수많은 내 사진 중에서 내가 가장 아끼는 사진은 위의 저 녀석이다. 이 사진에는 내가 담으려던 대상과 그것을 찍는 나의 모습이 한 번에 들어있다. 나는 아직도 어떻게 이 사진이 찍히게 된건지 모르겠다. 다중노출이 되는 카메라도 아니었고, 필름도 항상 신경써서 감는데, 신기하게도 이런 결과물이 담겨있었다.

사진은 생활이다. 나는 높은 가격에 팔릴 한 장의 마스터피스를 얻기 위해 부지런히 무거운 카메라들을 들고 다니는 것이 아니다. 나의 생활을 담고, 그 생활 속에서 나의 시각으로 보는 세상의 모습을 남기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의 시행착오와 실수, 간간이 오는 성공도 모두 담고 싶다. A컷으로만 이루어진 단편 적인 대외용 포트폴리오보다 B컷이 한 롤의 2/3를 차지하는 내 개인 사진 폴더가 더 애착이 가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다.

작성자 songdiamond 작성일 2011-02-19 카테고리 #lifestyle # #b # #songdiamond

5 덧글

  1. afterain
    afterain ·

    마지막 문단의 내용에 공감하며 추천 꾹.

  2. payeeri
    payeeri ·

    정말 많은 공감이 가네요. 그래도 님의 B컷 사진들에 비하면 제 사진들은 C- 컷 정도랄까ㅋㅋ 제 사진들은 창피해서 그냥 저 혼자 기억을 떠올리며 만족해하는 사진들이 거의 대부분이예요, 사진관 언니들한테도 많이 혼나서ㅠㅠ

  3. ricoyong
    ricoyong ·

    이번 기사 기대했는데, 멋집니다!!!

  4. kimdaehyun
    kimdaehyun ·

    그동안 개인적인 검열로 주목받지 못했던 사진들을 다시 찬찬히 펼쳐보아야 겠어요.
    의미있는 좋은 기사 감사합니다.

  5. kdh50000
    kdh50000 ·

    기억과 추억... 좋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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